신문에서 배우다

구차미봉<苟且彌縫>

다림영 2011. 5. 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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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5/20

정민의 世設新語

 

만년에 연암 박지원<1737~1805>이 병중에 붓을 들었다. 먹을 담뿍 찍어 빈 병풍에다 여덟 글자를 크게 썼다. "인순고식<因循姑息> 구차미봉<苟且彌縫>."그리고 말했다. "천하만사가 이 여덟 글자 때문에 어그러지고 무너진다."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 연암의 기억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에 보인다.

 

연암은 이 말을 즐겨 썼다.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큰 근본이 무너지면 백성의 뜻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게 되어 모든 일에 요행을 바라게 된다. 임금이 날마다 부지런히 계책을 내지만 마침내 인순고식으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고, 신하들이 그 명을 받들어 이랬다저랬다 해봤자 구차미봉에 그치고 만다. 이것이 진실로 천하의 큰 근심이다."

 

세상 일은 쉬 변한다. 사람들은 해오던 대로만 하려 든다. 어제까지 아무 일 없다가 오늘 갑자기 문제가 생긴다. 상황을 낙관해서 그저 지나가겠지, 별일 없겠지 방심해서 하던 대로 계속하다 일을 자꾸 키운다. 이것이 인순고식이다. 당면한 상황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인순고식의 방심이 누적된 결과다. 차근차근 원인을 분석해서 정면돌파해야 한다. 하지만 없던 일로 하고 대충 넘기려 든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차곡차곡 쌓인다. 어쩔 수가 없으니 한 번만 봐달라는 것이 구차<苟且>다.

그때 그때 대충 꿰매 모면해서 넘어가는 것은 미봉<彌縫>이다. 그러다가 한꺼번에 터지면 손쓸 방법이 없다.

 

 

서명응<1716~1787>도 '여측편<여測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허물은 꾸며서 가리면 안된다. 꾸미려 들면 내 마음을 크게 해친다. 하물며 구차미봉 하면 앞서의 허물을 바로 잡기도 전에 다음 허물이 잇따라 이르러 마침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그런 뒤에 이리저리 고민해봤자 한갓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할 뿐이다."

 

요즘 나라 일이 꼭 이모양이다. 한동안 신공항 문제로 시끄럽더니, 이번에는 과학벨트 때문에 난리다. 번번이 정면돌파가 아니라 구차미봉으로 덮기에 급급하다. 울며 보채면 떡 하나씩  주고 참으라고 한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한다.

 

 

중앙의 일처리가 이러니, 지역은 시끄럽게 떠들어서라도 요행을 바란다. 그래야 떡 하나라도 챙길 것이 아닌가. 당초의 좋던 취지는 무색해지고, 없던 문제를 만들어 키운다. 좋은 일 하고 욕만 먹는다. 인순고식도 문제지만 구차미봉은 더 심각하다.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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