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는 , 우리가 경험한 쾌락의 강렬함은 잊혀지지 않지만, 그 강도에 대한 추억은 잊게 된다고 말했다. 사랑이 끝난 뒤에 남겨진 진정한 잔해는 우리의 추억이고 그 추억을 간직하거나 버리는 데에는 수백 수천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최악의 방법은 사랑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는 다는 것이고, 망각은 모욕과 모독의 흔적을 지워 주지만 그와 동시에 사랑했던 사람마저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세상에는 분명 용서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별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면, 모든 것을 가능한 빨리 처리하고 싶어하듯이, 나쁘게 이별 할 때 사람들은 서둘러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 중의 하나는 사람 사이의 감정은 단숨에 쓸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중단되거나 끝나거나빠질 수 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계의 종말이 그 관계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나는 사랑의 폭력적이고 험악한 측면을 부정하거나, 사랑보다는 우정이 낫다는 식의 유치한 비교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증오가 사랑에서 태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랑의 이야기에는 항상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문제는 , 그 사랑의 이야기를 몸소 체험하든 끝을 내든 간에 우리는 한심하고 무식한 문맹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사랑의 종말을 피할 수 없는 억압처럼 여긴다. 그래서 마치 눈을 질끈 감고 쓴 약을 삼키듯 가능한 빨리 끝내고 싶어하고, 그 과정이 쉬울 수록 그것을 좋은 이별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별의 수사법에서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표현, '앞으로 친구로 지내자'는 제안은 버림받은 사람에 대한 최악의 모욕이다.
"이별을 선언한 사람이 남겨진 사람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은 흔한일이지만, 그건 정말 끔찍한 짓이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안에서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모든 권한을 갈취하는 가장 잔인한 행위이다. 그는 자기가 버린 사람을 아직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고 그런 극적인 경우는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흔희 볼 수 있다.
상대가 그런 '관대한' 제안을 경멸해도, 자신은 그것이 아주 공정한 보상이라고'진심으로'믿고 있는 것이다. 떠난 사람은 남겨진 사람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으면서 이 타락한 최후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우정'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헤어지기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권한을 여전히 유지하고, 합법화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사람은 이 우정이라는 왜곡된 관계에서 아무런 권리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먹잇감을 포획한 맹수가 그 먹잇감에게 형편없는 먹이를 주면서 잡아 먹힐 날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과 똑 같은 행동이다. 바로 그것이 그가 말하는 우정의 실체다"<스테파노 보나가, <사랑의 절망에 대하여>>
사랑은 마법과 같은 것이어서, 견뎌 내거나 피해 달아나는것 이외의 선택은 없다. 세상에 사랑보다 더 불편한 것은없다. 사랑에 빠진 순간, 우리는 온몸을 갉아먹는 벌레의 먹이가 되어버린다.
마술이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생각은 마치 자신의 고리를 물고 돌고 있는 한 마리 뱀처럼 끊임없이 이어지고, 수많은 모습들이 마치 원무를 추는 것처럼, 미친듯 돌아간다.
발레리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이런 상황에 세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첫번째가 복귀restituutio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다. 두 번째가 보상 recompense으로, 'A대신에 B를 취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만족 satisfactio으로,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다.
첫번째 해결책은 '무관심'의 추구로서, '그럴 필요 없었어' '내가 누구를 위해서 그토록 애를 썼던가?",'차라리 저 사람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지금이라도 인연을 끊는 것이 상책이야'라는 식의 생각을 대변한다. 두번째는 곧 찾아올 새로운 사랑을 기대하면서, 성적이고 감정적인 자유를 누리겠다는 생각을 말한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 그 사람을 쉽게 잊을 수 있겠지...' 그리고 세 번째는 실제로 정신과에서 증오심 치료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이들 세가지 시도는 모두 현실성에 입각하고 있다. 단지 두 번 째 시도마은 미래 지향적으로, 현재의 굴욕적인 모습을 새로운 만남에 대한 즐거운 기대로 대체하려는 욕구를 보여준다. 이들 해결책은 정말 유효한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절대적인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러나 사랑의 슬픔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는 '초연超然'일 것이다. 목을 자르듯이 단번에 이 세상 모든 것들과 결별하는 초연함을 얻을 수 있다면 과거의 환영들이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거나, 고통의 벌레가 육신을 갉아먹는 일도 없을 것이다.
시실리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서 참수 당한 성자들의 가호를 비는 풍습이 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랑의 상처에 가장 좋은 치료약은 역시 시간이다. 시간은 상처를 소독하고, 아물게 하고 사라지게 만든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시간은 위대한 스승이다'라는 가르침은 몹시 쓰라린 충고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그 어느것도 중요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흘러가 버린다는 얘기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치료약은 보다 심오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고, 사랑의 종말은 '인간은 왜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절실한 문제를 야기한다. 인간은 왜 운명적으로 사라 질 수 밖에 없는 사물과 사람을 원하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는가?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무언가를 잃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왜 우리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어린시절을, 사랑을, 소중한 기억을, 아끼는 사람을, 일을, 자신감을 잃을 수 밖에 없는가?
우리는 이런 상실을 끊임없이 보상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우리는 삶의 소용돌이 에 맞서서,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의도적인 무관심과 초연한 태도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발레리는 말한다. "나는 벌써 50년째 사랑에 빠지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상실햇고, 그 상실감과 함께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욕망하고, 사랑하고 사랑에 빠졌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건에 따라 이미 예정된 대로, 사랑이라는 그 이상한 모험에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사랑에는 순응해야 할 규칙들이 있고 , 우리가 그 규칙들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훗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을 방법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규칙들 자체가 우리 삶의 존엄성과 신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규칙들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고통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원하고,갈망하고, 이룩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존재의 현실적인 상황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것들임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이런 시련은 잠정적인것, 우연한 것, 불완전한 것들을 받아들일때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낭만주의 자들인 우리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이미 덜 아프게 헤어지는 방법을 터득했고, 사랑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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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막연하고 모호하게 시작되지만 종말은 '해고'와 똑같은 모양새를 취한다. 오늘날 여러 회사들은 가능하면 잡음없이, 조합에서 시끄럽게 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불필요한 직원을 신속하게 잘라 버리는 노하우를 터득하고 있다.
이별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직면하기보다는, 이별을 하찮은 일로 간주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이 사회의 능률적인 기능의 한부분에 흡수시켜 버리는 것이다.
프랑코 라 세클라
1950년 이태리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인류학자이며 도시학자로, 이태리와 프랑스를 오가며 강의하고 있다. 에쿠아도러, 베트남, 인도 , 우즈베키스탄, 파타고니아, 투레그 등의 원주민을 연구하면서,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현대인의 '원시성'과 '기이함'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10여편의 저작을 발표한 바 있으며 , 대표작으로는 <오해<Balland, 2002><인간의 본질><Liana LEVE, 2002>등이 있다.
임왕준
프랑스 파리 4대학 소르본에서 앙드레 말로에 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파리 8대학 철학과에서 엠마뉴엘 레비나스에 대한 연구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는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의 삶과 죽음의 명장면><로제폴 드르와, 샘터서, 2003><사랑><산드로 마라이, 솔 2003>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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