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팔공산/박헬레나

다림영 2008. 10. 17.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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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10월의 끝자락 쯤 팔공산에 가십시오. 세월과 더불어 대구 분지를 보듬어 안고 겹겹이 드러누운

그 산자락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4월의 꽃 잔치도 화려하고 5월의 신록도, 6월의 녹음도 좋지만 자신을 아낌없이 태우는 마지막 불꽃같이 아름다운 것이 또 있겠습니까.

 

흔히들 일년 중 겨울을 계절의 끝으로 잡지만 나는 가을이 한 해의 결실을 거두어 들이고 마무리 짓는 완성의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뭇 생명들이 긴 겨울잠 속으로 들어가기 전 바로 그 시간 말입니다. 가을은 눈물이 나도록 쓸쓸해서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저무는 것에 대한 연민으로 계절의 초입에서부터 나는 환자가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가을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내가 가을이 되면서 부터인 것 같습니다.

 

단 풍구경은 불로동을 지나 백안 가는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은 은행나무 길입니다. 질러가느라 파계로쪽으로 들어서면 헛일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지름길을 좋아합니다. 속도에 연연하여 들어 선 지름길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지나가는 지 팔공산 단풍 길이 잘 보여 줄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수천마리의 노랑나비 떼가 날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비상인 듯도 합니다.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 적멸을 보고 있으면 오가는 세상사 모든 것이 소슬하고 내 발이 한 조각 구름을 딛고 섰다는 생각이 울컥 치밉니다. 노란 이파리 한 움큼 보듬어 가슴에 얹어 보면 그 안에서 한 삶을 찬미하는 감사의 노래가 들려 올것 같습니다.

 

동화사가 가까워지면 벗나무 길이 나옵니다. 그 길은 차에서 내려 걸어야 제맛입니다.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 발밑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 눈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색의 향연이 봄꽃을 무색케 합니다. 홍단풍이 탑니다. 환하게 등을 켠 그 불꽃 속에서 나도 타고 싶습니다 . 불순물은 깡그리 태우고 순수만이 남는 정화의 용광로 속으로 뛰어 들어도 좋겠습니다

 

단풍을 보고 있으면 말을 잃어버립니다. 무언가가 가슴에 치받치어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럴때는 언어는 얼마나 초라한 것입니까. 섣부른 말 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더 어울릴 성 싶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그저 목을 타고 넘어오는 소리는 '아! 아! ' 하는 탄성뿐입니다.

 

이 가을에 나도 물들어야 합니다. 발효되지 못한 시퍼런 자존이 가슴에 버티고 안간힘을 씁니다. 내가 무슨

색깔로 물들어야 할지, 빨강일지 노랑일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바탕이 맑아야 고운물이 든다는데 할수 있다면 좀 더 밝고 단순한 빛깔로 남은 날을 채웠으면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다소 가파르고 험했더라도 '고왔노라' '아름다웠노라'는 몸짓으로 만추를 채색할까 합니다. 장식이 지나쳐 분식粉飾 이 되는 우는 범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그 경계 또한 애매한 것 아니겠습니까.

 

팔공산의 사계를 보는 것은 우주를 보는 것입니다. 터지는 꽃눈에 탄생의 신비를 읽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연두색 잎에서 넘쳐나는 생명의 기운을 느낍니다. 숲을 스치는 휘파람 소리가 가슴에 잦아들 때 바람을 만나고, 천둥과 소나기에도 당당하던 호흡이 하룻밤 무서리에 까무러쳐 쓰러지는 불가사의도 만납니다. 산은 생성과 소멸 순천順天의 의미까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팔공산은 사시사철 아름답습니다 . 봄은 봄대로 곱고 여름은 여름대로 싱그럽습니다. 겨울은 나목위의 상고대가 멋집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여지없이 불사르는 가을 단풍이 팔공산 경치의 백미입니다. 오랜 풍상과 인간의 애환을 묵묵히 지켜보며 산은 말이 없습니다. 다만 시간에 순응하여 계절 따라 향과 색이 다른 옷을 갈아 입을 뿐입니다.

 

그대, 서편에 기운 해를 지고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단풍길에 서면 멋진 한폭의 그림이 될 것입니다. 꿈을 좇아 달려온 남루한 시간들이 늦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그대의 은빛머리카락 위에서 더욱 빛나보일 것입니다. 10월에는 팔공산에 가 보십시오. 그 가로에 발을 딛는 순간 숨쉬는 것조차 은혜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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