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바람이 좋아서 뜰에 나와 있다.
초승달이 별 하나 거느리고 하늘가로 온다. 탈탈거리던 경운기소리가 요란하다. 수런거리는 나뭇잎사이로 별이 동동뜬다. 반딧불이다. 농약으로 메뚜기를 볼 수 없는 농촌에서 반딧불을 보는 마음 반갑기 그지 없다. 지금도 시골에서는 개똥벌레라 부른다. 이쪽에서 반짝이는가 하면 저쪽이고, 빛나는 가 하면 사라지는 반딧불을 보고 있으면 내 나이 열두살, 그 여름이 떠오르고 희미한 기억 너머 한 아이가 생각난다.
집 앞 큰길이 살마들로 가득찼다. 난리를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민들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찹쌀과 보리를 볶아서 미숫가루를 만들고 아버지는 봇짐을 싸는 데 나는 공연히 설레였다. 우리도 어디론지 떠난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곡마단의 서커스 구경 갈 때처럼 호기심 부푼 기대였다.
이따금씩 먼데서 천둥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가 사람을 죽이는 대포소리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걱정이라면 내가 기르고 있는 서른여섯마리의 토끼들이었다. 그 대 우리집은 뒤꼍이 넓엇다. 복숭아와 살구, 앵두가 열린 과일나무가 여러그루였고 푸성귀 예쁘게 자라는 밭머리에 돼지우리가 있었는데, 돼지 대신 토끼를 길렀다. 한 자웅으로 시작해서 서른여섯 마리로 불어난 토끼들은 내 손으로 처음 길러보는 동물이었다.
집을 떠나기 전 토끼집 문을 열어주었다. 며칠 있으면 새끼를 낳을 어미 토끼가 두마리였다. 텃밭에 풀어놓으면 굶어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고 구경다녀오듯이 금방 다녀오리라는 직감이었다.
인민군이 장호원까지 내려왔다는 피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날 밤 길을 떠났다. 피난민 대열은 길을 메웠고 밤새도록 걸었어야 이십 리 밖이었다. 내가 동경했던 미지의 세계는 없었다. 당장에 아비규환의 아수라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감우리 고개에서 치솟고 총알 날아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앵-하는 소리 같고, 쇄쇄쇄-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친척 댁 사랑방에서 밤을 지새며 음성 읍내가 불바다가 되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감우리 고개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그 때까지 밀리기만 하던 국군이 처음으로 승전한 전추였다고 한다. 그러나 승전은 며칠 못가서 무너졌다. 곳곳에 인민기가 꽂혀있고 피난민 행렬도 뜸했다. 인민군이 앞질렀기 때문에 남으로 내려가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만 두고 우리가 집으로 돌아왓을 때 우리집은 인민군들이 병원으로 쓰고 있었다. 방과 대청에 부상병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우리가 주인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집을 떠나지 않은 것은 토끼들 때문이었다.
밤낮없이 폭격이 계속되었다. 고물개 비행기였다. 어른들은 전투기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비행기의 날개가 고물개를 닮았대서 그렇게 불렀다. 비행기만 떴다 하면 방공호로 뛰엇다. 너무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방공호 속에는 누군가 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도 그가 숨죽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떨고 있다고 느꼈다.
비행기가 사라지고 나면 마당에서는 기합이 벌어졌다. 개머리판으로 마구 두들겨 패다가 구둣발로 걷어찼다. 매를 맞는 인문군은 조그만 아이였다. 군복의 팔소매를 여러번 걷어 올렸고 총대가 땅에 끌렸다. 폭격이 있을 때 방공호에 숨었기 때문이라 했다. 바지에 빨간 줄을 친 인민군이 새끼든 어미토끼를 총으로 쏘았다. 내 사랑하는 토끼는 총에 맞아 죽으면서 새끼를 쏟았다. 그날밤은 더욱 깜깜했다. 갑자기 쇳소리를 내며 비행기가 떴다. 식구들은 방에서 이불을 쓰고 있는데 나는 방공호로 달렸다. 거기라야 안심이 되었다. 한동안 따따 거리던 폭격이 멎자 무시무시한 정적이 엄습했다.
그때였다. 어디선지 반딧불이 날아왔다. 반짝이다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저만치서 다시 반짝였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에 살아 있는 것은 반딧불뿐이었다. 겁이났다. 불빛을 보면 비행기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 방으로 가려는 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인민군 아이였다. 아이는 비행기가 무섭다고 했다. 배가 고프다고도 하고 어마이가 보고 싶다고도 했다. 집에는 나만한 여동생이 있다면서 개똥벌레를 잡으러 다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개똥벌레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이는 어느 날 밤에 부대와 함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셀레기만 하던 피난길이 죽음의 골짜기임을 안 열두살의 여름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먼 옛날 중국에서 차유과 손강이라는 사람이 가난하여 시름을 살 수 없어 반딧불과 눈빛으로 공부를 하여 성공하므로 형설의 공방이라는 말이 생겨
ㅆ다고 한다. 반디는 암컷만이 꽁무니에 발광기를 달고 있어 저 있는 것을 무리에게 알리기 위해 빛을 내는 데, 창백한 빛을 내는 것이 반딧불이다.
애반디는 반딧불보다 조금 작은 데 노란빛을 불규칙하게 낸다. 학교에서는 발광기에 루시페린이나 루시페아제라는 것이 있어 물질에 산소와 물에 닿으면 빛을 낸다고 배웠다.
한때는 삶과 죽음이 반짝이다 사라지는 반딧불 빛이 아니랴 싶기도 했다. 최초로 주검을 목격한 그 여름 후 숱하게 스쳐가는 만남과 이별, 있음과 없음. 얻음과 잃음 또한 반딧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반짝이는 것에 강도를 두거나 사라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 두가지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느낀다. 명멸의 순간 속에 내가 서 있다. 반짝인다고 기뻐하거나 사라졌다해서 절망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반짝임에 기대고 싶어지는 것은 어인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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