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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읽기

다림영 2024. 1. 19.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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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뿐인생/이정록

터미널 뒤 곤달걀집에서 노란 부리를 내민 채 숨을 거둔

어린 병아리를 만났다 털을 뽑을 수가 없었다

도저해, 맛소금을 찍을 수가 없었다

 

곡식 멍석에 달기똥 한 번 갈긴 적없고

부지갱이 한 대 맞은 적 없는 착한 병아리,

언제부터 이 안에 웅크리고 있었을까

 

물 한 모금 마셔본 적없는 눈망울이 

나를 내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폐가의 우물 속 두레박처럼

그의 눈망울에 비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얼마나 오래 제 자리를 애돌았는지, 병아리의 

발가락고 누꺼풀 위에 잔주림이 촘촘했다

하늘 한 번 우러러본 적 없는, 부검뿐인 생

금이 간 창문에는 그 줄기를 따라

작은 은박지 꽃이 붙여져 있었다

씨앗이 가질 수 있다는 듯, 은박지 꽃잎들이 

앞다투어 바래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 이정록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

"들여다보면 어디에든 시가 있지요."

세상의 만물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를 언어로 묘사하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뜻이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하찮은 곤달걀도 들여다 보면 시가 있다. 부화하지 못한 병아리를 묘사하는 화자의 마음속에는 착한 연민이 웅크리고 있다. 연민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죽은 병아리의 눈망울도 또렷이 살려낸다. 병아리는 계란의 안쪽에 있고 화자는 계란의 바깥쪽에 있다. 병아리는 사람을 내다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불혹不惑,혹은 부록附錄/강윤후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서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괞이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불혹에서 부록으로 건너가는 즐거운 말장난, 그것을 가벼운 유희로만 읽지 못하겠다.삶의 목차가 마흔 살 이전에 끝났다는 인식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나이를 가지고 한껏 엄살을 떨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오해다. 시인은 시의 뒷부분에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준비해 두고 있다.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무엇에 좀 홀려 살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불혹 이후를 단지 부록으로만 여기지 않겠다는 안간힘, 혹은 뻗댐의 표현이기도 하다. 

 

진흙탕에 찍힌 바퀴자국/이윤학

진흙탕에 덤프트럭 바퀴 자국이 선명하다

가라앉은 진흙탕 물을 헝클어뜨린 바퀴자국 선명하다.

바퀴자국위에 바퀴자국. 

어디로든 가기위해

남이 남긴 흔적을 지워야 한다.

다시 흔적을 남겨야 한다.

물컹한 진흙탕을 짓이기고 지나간

바퀴자국, 진흙탕을 보는 사람 뇌리에

바퀴작국이 새겨진다.

하늘도 구름도 산 그림자도

바퀴자국을 갖는다.

진흙탕 물이 빠져 더욱 

선명한 바퀴자국.

끈적거리는 진흙탕 바퀴자국.

어디론가 가고 있는 바퀴자국.

 

덤프트럭의 바퀴자국이 이렇게 멋진 시가 되는 이유는 두 가지. 첫번째는 시인의 예사롭지 않은 관찰력이 돋보인다. 남이 남긴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바퀴의 비정함을 시인이 간파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열 차례난 '바퀴자국'이 반복해서 시행을 밝고 지나가도록 만든 시인의 엉큼한 기술, 그 꿈틀거리는 무늬가 읽는 사람의 머리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시에다 자기감정을 과장해서 덧틸하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은 이 시의 구조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공부해도 좋으리라.  

 

책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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