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니 입이 간지러워
웃으며 친구 불러 자랑했네.
아득하게 느껴지는 초등학교 시절, 검정 고무신을 사 들고 집에 돌아와 친구에게 자랑한 내용이다.
줄포장은 닷새만에 서는 장이었다.
나는 장날을 그렇게도 기다리며 살았다. 장날이 오면 아버님께서는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고기반찬을 사기 위하여 몸소 장에 가셨다. 하얀 도포 자락에 헌 갓을 쓰고 십리 길을 걸어 장에 가는 선비의 뒤쪽에는 항상 막내 아들인 나의 그림자가 어김없이 따라 다녔다.
그날도 장날인데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장터로 가는 눈길, 십리 길, 우리 부자(父子)는 장을 다 보아 놓고 으례 국밥집에 들러 요기를 했다. 벌겋게 타고 있는 장작불 위에, 걸어 놓은 가마솥에서 부글부글 끓어 돼지 창자로 만들어지는 국밥집의 풍경, 그것은 든든한 충족이며 가난한 자의 구수한 향수였다. 그 집에 들어서면 농사일로 굵어진 농부들의 손들이 연방 막걸리잔을 들어올리고, 황금 이빨 무너진 촌로(村老)들이 혼자, 혹은 서넛이서 앉아 인생 역정(歷程)을 도란도란 나누고 있었다.
꿈길에서도 귀하게만 여기던 검정 고무신을 한 켤레 사서 무릎 위에 올려 놓고, 국밥을 먹고 있던 소년, 그는 분명 하늘을 날으는 착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따끈한 국밥으로 배를 채운 뒤, 시장을 구경하며 생필품 몇 가지를 사서 보따리에 싸고, 아버님께서 친구 한두 사람 만나면 해는 서산에 얹혔다. 돌아오는 길엔 눈발이 날려도 추위를 크게 느끼질 못했다. 산새 날아간 어두운 들녘길을 따라 하나둘 밀어처럼 돋아나는 별빛을 헤며 걸었다. 억새풀 사이 낮은 산들이 반가이 맞아주고, 외딴집 등불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집에 당도하면, 뜨끈뜨끈한 온돌방 아랫목이 그리도 좋았다.
오늘은, 덜걱거리는 승용차를 몰고 나왔다. 그 국밥집을 찾고 싶어서였다. 차창에 어른거리는 이순(耳順)이 임박한 자신의 얼굴을 헤아린다. 옛 기억 하나로 찾아나선 골목길. 그러나, 50년 전 집이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근방의 곰탕집을 찾아 들었다. 국밥이란 것은 없고 곰탕이 있단다. 한 그릇을 불러 놓고 보니, 와락 아버님의 모습이 어른거려 쉽게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잿빛 거리, 잔술 위에 뜬 그리운 얼굴, 당신을 향한 불효의 회한은 자꾸만 속울음으로 떨고…. 투박한 곰탕그릇에서 얼른 껴안게 되는 부정(父情)의 기류는 가슴을 짜릿하게 눌렀다. 나도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체득한, 아비로서의 애틋한 사랑이 이제야 인간의 혈맥 속에 흐르는 영원한 향수임을 알 듯도 했다.
곰탕이 옛날의 국밥을 대신해 주어 다행이다 싶었다. 나도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따스한 마음으로 달려가 추억을 확인하는 내가 행복한 사람이 어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삶에 배어든 추억이란 지난날의 감정이요, 가난도 지나놓고 보면 맛볼 만한 감정이다. 행복이 별것이랴. 모두가 정을 들이는 일과 그리운 자리를 찾아드는 것이 행복이려니.
나이가 들수록 그 장터의 구수했던 내음이 그리워진다. 목마른 시간에 그리움의 문신이 눈물 섞여 다시 슬픔으로 떠오를 때, 그 집을 자주 찾으련다. 어릴 때의 행복의 묶음은 아련한 단내음으로 남아 있기 마련인가 보다. 놓쳐 버린 풍선처럼 아스라히 떠나, 가슴 부풀던 날들의 열망, 내 마음 한자리에 살아 있음의 은은한 표상으로 낙인되어 있다.
귀뜸하여 주소.
내가 살아온 세월의 부피가 얼마인가? 아쉬움이 많기에 헤기도 싫은 애착뿐이다. 눈보라, 삭풍의 세월을 부자(父子)천륜의 정을 두텁게 쌓아준 국밥의 향수, 이젠 견고한 고독의 일점으로 남아 오히려 서럽다.◑
[문창]96년 10월호
◇김동필 동국대 정치학과 졸업. 『月刊文學』에 수필, 월간 『韓國詩』에 詩당선 등단. 內藏文學會 창립회장, 전북수필문학회初代부회장 역임. 『전북의 별』 受賞. 全北隨筆文學賞, 新亞文學賞수상. 노령新聞칼럼리스트,노령新聞논설위원.井州高等學校교사. 현재 백제예술대학 외래 교수. 저서로 『하얀 대화』 『그리움이 타는 길목』 『풀잎의 祝祭』 『井邑의 傳說』 『井邑지방의 民俗』 『억새풀 하얀 머리』 『石坡 柳鍾九 선생의 生涯』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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