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詩

[스크랩] 이상국의 `나도 보험에 들었다` 감상 / 권순진

다림영 2013. 10. 1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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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보험에 들었다/이상국-

 


좌회전 금지구역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택시기사가 핏대를 세우며 덤벼들었지만

나도 보험에 들었다

문짝이 찌그러진 택시는 견인차에 끌려가고

조수석에 탔다가 이마를 다친 남자에게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법대로 하자고 했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나의 불행이나 죽음이 극적일수록

보험금이 높아질 것이고

아내는 기왕이면 좀더 큰 걸 들지 않은 걸 후회하며

그걸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가구를 바꾸며

이 세계와 연대할 것이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감상>

 

 

 상황이 이 지경이면 그야말로 꼼짝 마라다. 다툼의 여지가 없고 이설의 까닭이 없다. 아무리 보험에 들었어도 큰소리 칠

만한 일은 못 된다. 그렇다고 죽을상까지 지을 필요는 없다. ‘눈도 꿈쩍하지 않고 법대로 하자고’한 건 현명한 대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필요 이상의 저자세가 공연히 상대의 공세를 증폭시켜 피곤한 상황으로 발전될 수 있으니 말이

다.

 

 그래서 보험이 좋긴 좋다. 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가해자나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보았을 것이다. 내 경우도

양쪽의 입장을 다 경험하였는데, 가해 당사자일 때는 보험이 허용하는 한 상대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지만 피해자가 된 경

우엔 대체로 수월케 넘어갔던 것 같다. 신호대기중인 차를 뒤에서 냅다 들이받아 목과 허리가 휘청했을 때도 범퍼를 교체

한 것 말고는 달리 요구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건 내가 무슨 대단히 양심적이고 특별히 상대에게 관용을 베풀어서 그

런 건 아니다. 그냥 별로 아프지 않아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 했을 뿐이고 차만 고치면 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가끔은

가로늦게 후회가 들 때도 있었다.

 

 얼마 전엔 좀 황당한 일이 있었다. 늘 다니는 길에서 큰 도로로 우회전 진입하기 위해 좌측의 상황을 살피는 사이 우측에

서 역주행한 자전거가 내 차를 들이받아 자전거에 탄 사람이 넘어졌다. 넘어진 60대 아저씨를 병원으로 모셔가서 진단을

받으니 다행히 약간의 무릎 찰과상 말고는 다른 이상은 없었다. 보험사에 연락해서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했더니 자전거

수리비용 10만원에 진단서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경미한 상처임에도 위자료 60만원을 지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할

증 10%가 적용될 것이란 통첩을 받았다. 

 

 ‘나의 불행이나 죽음이 극적일수록 보험금이 높아질 것’은 물론이겠지만 사실 모든 접촉 사고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보험에 들었지만 내게 이 경우는 좀 희극적이다. 어쨋거나 비극적이거나 이런 희극적인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조심 조심 운행하는 수 밖에 없다. 주말 가을 나들이에 차를 몰고 가시는 분들 모두 안전운전 하

시기를.  

 

-권순진(시인)

출처 : 시와 글벗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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