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詩

노끈/이성목

다림영 2013. 10. 9.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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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끈

 

마당을 쓸자 빗자루 끝에서 끈이 풀렸다

그대를 생각하면 마음의 갈래가 많았다

생각을 하나로 묶어 헛간에 세워두었던 때도 있었다

마당을 다 쓸고도 빗자루에 자꾸 손이 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른 꽃대를 볕 아래 놓으니

마지막 눈송이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들어

남은 향기를 품고 사라지는 걸 보았다

몸을 묶었으나 함께 살지는 못했다

쩡쩡 얼어붙었던 물소리가 저수지를 떠나고 있었다

묶었던 것을 스르르 풀고 멀리서 개울이 흘러갔다

 

 

 

 

 

탈색

 

색이 없는 단청 아래 오래 서 있다

색이 사라진 까닭을 스님에게 물어야 할까

바람 한 겹만 벗겨도 청동물고기가 살아나고

추녀 끝 파르르 떨리며 공중이 푸른 바다가 되는

내소사 대웅보전 마당에서 나는 비린 아가미를 달고

, ,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육신의 경문을 소리내어 읽는다

주름이며 결만을 생생하게 그려낸 꽃문살이 문에 가득 떠있는 곳

꽃은 어느 절정을 채색하다 황망하게 졌을 터

색은 바래어 어디로 갔는가

덜커덩 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는데

채석강 젖은 책 더미에 불을 지른 노을

다시는 색에 들지 않으려고 꽃무릇 곁

씻은 붓을 세워둔 채 사그라든다

 

 

청성淸聲 자진한잎

 

바람이 불었다. 밤새 산비알을 쓸던 바람은 날이 밝자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바람은 들어앉을 몸을 얻으려고 산죽을 바닥까지 휘어놓고도, 들어앉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 깊은 잠 속의 흐느낌처럼 소리로만 육체를 드러낸다.

 

당신은 시김새 없이도 한 생을 이루었다. 저 바람처럼, 어쩌면 몸 없이 회오리치는 것이 생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소리로 인해 일어서고 드높아진 영마루 같다.

 

바람이 누웠다. 소리로 와서 소리없이 사라질 줄 아는, 높새바람이었다.

 

 

 

화선지에 수묵담채

 

산을 바라보다가, 몸에 고요하게 저를 포개는 바람을 보았습니다. 바람이 산에 스미어 번져가는 수묵의 능선, 구름 요와 하늘 홑청 눈부신 진경산수에 우리가 훌훌 벗고 물소리 바람소리 환해질 여백을 어루더듬으니,

 

묵은 가마터에 불 지펴 갓 구워낸 백목련 하얀 종지마다, 바람꽃 양지꽃 겨우내 색을 걸러 고운 안료 소복하게 빻아두었습니다. 개울가 능수버들 찬물에 마른 붓을 씻어 건집니다. 평생을 채색할 밑그림 한 장 우리 몸을 섞어 그릴 것이다.

 

바람이 바람 아닌 것을 흔들어 바람인 것을 보여주듯이, 당신도 당신 아닌 나를 일깨워 당신을 알게 하는 것이라,

 

볕에 덴 그늘 가만히 벗겨 손부채로 식혀내는 나비의 시간, 막 피어난 꽃잎 핏물 젖은 음순처럼 붉어 긴 혀를 꺼내들고도 일획을 긋지 못하였으나, 화선지를 곁에 둔 봄날이 색을 칠하는 일로 애틋합니다.

 

 

그 저녁의 흐느낌처럼

 

어둠에 등을 대고 부음을 듣는다

목덜미를 스쳐 어깨를 넘어가는

울음은 주름살 사이에 고여도 깊다

그렇게 떠날 것은 무엇인가

기별을 꽃처럼 전할 것은 무엇인가

맺혔다가 풀리고

풀려서 수런거리는 강물이

한 몸을 받아 철렁 내려앉은 봄날

낮고 아득한 흔들림에 귀 기울이는데

꽃잎 한 장 이마를 짚는다

그 찬 손에 화들짝 깨어나면

얼굴 가득 번지는 연꽃

붉게 피었다 져도 나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있는듯도 하건만

사는 일이 이렇게 어둑해 질 것은 또 무엇인가

당신에게 살을 섞어도 모를

나는 누구냐고 자꾸 되물으며 여자가

아이를 지우고 돌아온

그 저녁의 흐느낌처럼

아파서 손 댈 수도 없는

멍이 배에 가득 번지는 것처럼

 

이성목 시집 노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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