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조를 쓰려면 / 사군자
이 글은 스토리 문학관(storye.com)의 자문으로 있는 필자가 시조 발전을 위하여 시조 창에 올린 글이다.
족보상으로는 孤山 윤선도의 10대 후손인 필자가 이 글은 시조와 시조창을 아끼는 마음으로 올린다. 아무리 다원화 시대, 국제화 시대라고는 하지만 우리 글, 개뿔이나 우리 문학도 다 모르는 인간들이 어학연수니 어쩌니 하는 온갖 이유로 어린 자녀를 외국에 보내는 모습이나 유명 연예인들의 병역 기피를 보면서 통탄하는 마음이다. 그런 국가관과 가치관, 인생관을 가側?사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 것, 우리 문화부터 먼저 익히세요." 시조는 詩調가 아닌 時調이다. 이 말은 문학성의 배제가 아니라 시조는 시대를 바로 보고 바로 읽으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때를 노래하되 의로움과 순수함과 진실함을 지향하라는 말이리라.
필자의 사견이지만 이런 취지에서 비록 문학성은 높다 할지라도 이방원의 "하여가"를 나는 시조로 보지를 않는다. 특히 "하여가"의 초장은 기회주의의 극치이며 이기주의의 정점이다. 이런 관(觀)을 가진 분이 시조를 노래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자존심 상한다. 정치적 욕심과 권력에 대한 집착성을 순수한 시조를 이용해 포장한 것이다. 개국의 명분이고 대의고 그런 것은 쿠데타적 발상에 기인한 자기들 말이다. 사람은 간사해서 미래가 없는 사람은 경계한다. 그러나 정몽주는 미래가 있는 사람도 멀리했고 거부했다.
나 감히 말하거니와 민족의 정체성과 그러한 역사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외부에 대항할 힘은 기르지 않고 안에서 도토리 키재기 하다가 동으로는 일제의 침노를 받았고, 북으로는 6.25가 왔다. 이제 경계해야 할 부분은 서쪽의 중국이다. 최소한 시조를 쓰는 사람은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사회와 국가는 변해도 하늘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한 앞이 아닌 무한의 존전에서 글을 써야 한다.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 할지라도 서정주 시인이 친일파로 후대에 욕을 먹는 것도 유한 앞에 꺾인 붓 때문이다. 반대로 고집스런 이육사는 어떠한가? 일제에 항거하다 투옥된 그의 수형번호는 264번이었다고 한다.
시조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 “청포도”는 오늘도 우리 가슴 속에서 알알이 여문다. 책을 내고 메스컴을 타 유명하면 뭐한가! 그렇게 돈을 벌면 출세했다고 또는 성공했다고 할 것인가? 문제는 기준이다.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작가에게 붓은 생명이며 신앙이다. 죽을 자리에서 깨끗이 죽어야 한다. 작가는 죽어도 글은 영원하다.
/// 정몽주 -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이방원 -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의 “하여가”는 치졸한 회유이며 교란이다. 결국 그는 부하의 손에 철퇴를 주어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죽인다. 당시의 이름 선지교는 충신이 죽은 자리에 대나무가 자람으로 나중에 선죽교로 불린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의 모친이 쓴 "백로가"는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시조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잇것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가책이 되어서일까? 태종은 즉위년에 문충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나
후손들은 거부했다. 그는 경북 영천시 임고 태생이나 묘는 성남에서 가까운 용인 모현에 있는데 이는 현인을 기린다는 뜻이다.
시조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제목이 던져져도 바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홍시"라는 제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읊어야 한다.
시보다 시조는 더 어렵다.
들꽃처럼 아주 소박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쓰라.
닭이 알을 품듯 계속 품어야 한다. 삐악, 삐악거려도 더 품어야 한다.
들로 나간 내 어린 병아리를 비정한 날씨가 보호해 주지는 않는다.
독자는 인색하며 냉정하다.
독자는 우군이 아니라 적이다.
화살 촉이 무디면 그는 쓰러지지 않는다.
독자가 읽어서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직 작품성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조급할 필요 없다.
박두진, 목월님과 함께 청록파의 한 분인 조지훈의 승무는 세상에 내놓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고 한다.
현장 답사에 소홀하거나 게을리 하지 말라.
책상 앞에서만 쓰는 글은 체온이 없다.
죄송하지만 시조 한 줄 건지기 위해 어느 강가 갈대밭에서 필자는 3일을 혼자 보릿가루를 물에 타 마시면서 지낸 경우도 있었다. "충북선"이라는 그 시조는 중앙일보 시조 백일장에 입상되기도 했다. 당시에 심사는 이우걸씨가 맡았었다.
내가 지금 무슨 대회나 상의 중요성을 주장함이 아니라 검증의 의미를 강조함이다.
사람들은 등단의 가치도 무슨 문학상으로만 오해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검증의 절차이다. 왜 검증의 절차가 필요한가? 상식 이하의 엉뚱한 소리를 할까 염려함이다.
항상 노트나 메모지를 소지하라.
붕어도 입질 타임이 있다. 쓸 때 쓰라. 굶더라도 쓰라. 몇 끼니 굶는다고 죽지 않는다.
제재와 소재, 주제에 안정감이 필요하다.
주제가 모호하면 그 글은 죽은 글이다.
묘사가 지나치면 구름이 되고 관조가 지나치면 설교가 된다.
시에 운율이 있듯이 시조에도 박자가 있다.
시조에도 육화(肉化)는 있다.
육화가 약하면 시조는 걷 돈다.
절대로 음보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 시조 읽는 맛이 음보에도 있다.
벌써 음보에서 엇박자가 나면 그 시조는 내용도 뻔하다.
현대시조에서도 자수는 기본이다.
그러나 현대시조가 반드시 고풍스러워야 함은 아니다.
아이스크림 속에도 비자나무 숲은 자란다.
고시조의 정형성은 유지하되 융통성은 있다.
하물며 고시조에서도 그런 예는 발견 된다.
오우가 서시에서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귀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더하여 무엇하리.
황진이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 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리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문제는 내적 그 정신의 흐름이다.
하지만 종장의 초구 3은 불문율이다. 여기를 어기면 그것은 어떤 이유로도 시조가 아니다.
가끔 이런 글들이 감히 시조창에 올라오는데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종장의 초입이 3과 5이상 이어야 함은 중학생, 고등학생도 다 아는 부분이다.
자신이 없으면 침묵할 일이요, 모르면 조용히 더 배워야 한다.
작품의 내공이나 역사성에 대한 인식은 두 번째로 둔다 할지라도 그렇다.
시조창은 습작실이 아니다.
작품 발표장이다.
여기는 시나 수필 마당이 아니다.
보고 있자니 답답하고 말을 하자니 " 너는 누구냐?"고 핏대 세워 대들 것이다.
초장 중장도 중요하지만 종장 처리가 가장 핵심이다.
시조를 분해하자면 3장 6구 12음보이다.
기본기에 충실 하라. 제식훈련은 전투의 골격이다.
자수에 걸리면 합당한 대체 단어를 연구하라.
사전으로 검색하고 철자법에 신경을 쓰라.
그래도 어색하면 수의 전체를 바꿔야 한다.
자기 작품을 제3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라.
아내나 남편, 친한 친구에게 작품을 보여주고 가끔 자문도 구하라.
질책이 칭찬보다 약임을 잊지 말라. 나부터 인간은 칭찬을 더 좋아한다.
독단과 편견에 안주하지 말라.
메시지가 이치에 맞아야 하고 진리라야 한다.
애국가나 유행가 가사 같은 빛이 바랜 상투적 용어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지내신 제 은사님께 눈물이 핑 돌도록 혼난 부분)
물 좋은 생선이나 채소처럼 표현이 신선해야 한다.
감정의 절제미가 있어야 한다.
직접 타격이 아닌 암시도 필요하다.
주제는 건더기가 아닌 국물로 녹아 있어야 한다.
서정성과 지성미의 조화가 필요하다.
수와 수의 고랑이 없어야 한다.
불필요한 단어의 중복과 이미지의 중첩은 그 시조의 약점이다.
연시조는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다.
한 줄기 아래 고구마처럼 연시조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진중하되 무겁지 않고 경쾌하되 근엄해야 한다.
최대한 부풀리고 최대한 압축해야 옳다.
불필요한 조사를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말을 적게 해서 가장 말을 많이 해야 한다.
시의 응축성을 폄하함이 아니라 시를 쓰다가 시조는 쓸 수 있지만 시조를 쓰다가 시는 쓰기 어렵다. 그만큼 시조에서의 압축은 시의 축약과는 그 농도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평시조 훈련 없이 연시조는 어렵다.
어려운 한자보다 우리 글, 우리 언어의 배열이 좋다.
언어 조탁은 반드시 시간이 길어야 함은 아니다.
찰나의 영감이 영겁의 작위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수정이나 퇴고는 반드시 필요하다.
적재적소의 언어배치는 중요하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명주실을 뽑듯이 앞선 남의 작품을 많이 감상해야 한다.
반드시 자기 색깔의 실을 뱉어야 한다.
남의 글의 모방과 모사는 농약이요, 독약이다.
그것은 자기기만이요, 시조에 대한 우롱이며 양심을 파는 일이다.
이런 분은 시조와 자신을 위해서 빨리 팬을 놓아야 한다.
어느 정점에 가면은 다른 작품을 멀리해야 한다. 본인도 모르게 의식 속에 침투한다.
평소 성실한 습작은 또 한 분의 스승이다.
늘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의 성찰에 인색함이 없어야 한다.
자기 글과 자기 말에 책임이 따름을 명심하라.
시인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다.
작품에도 내공과 품격과 최소한의 격조가 있어야 옳다.
시인은 진실해야 한다.
차가운 물에는 작은 빙어밖에 살지 못한다.
늘 더운 가슴과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심장이 유지 되도록
자기관리를 잘 해야 좋은 글도 나온다.
냉혈동물 같은 빙산 위에서 수선화는 피지 않는다.
시인은 삶과 자연을 사랑하고 늘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글에 완벽은 없다.
신춘 통과 작품에도 약점은 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후대에까지 오래도록 읽힐만한 별빛 같은 시조 한 편 남기기 위해
함께 몸부림을 쳐보자.
우리는 시조가 좋아서 시조를 쓰고 시조가 있어 행복하다.
물론
나의 논조가 꼭 시조라는 한 장르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리라.
평시조 한 수, 필자의 졸작이다. 언젠가 모 일간지에 실렸던 작품인데 짧지만 필자는 이 글을 나의 어느 글보다 더 아낀다. 심사는 시조시인이신 유재영님이 하셨다. 하고 싶은 말이 태산 같으나 오늘은 졸작이나 함께 감상하면서 마치기로 한다.
/// 옥탑방
낮달이
주인이라 자물쇠도 없는 방
고압선에 삶은 라면
웅웅웅 끓고 있다
실오리
목숨 줄기에 펄럭이는 흰 빨래.
[글쓴이: 사군자]
[출처] 좋은 시조를 쓰려면 / 사군자|작성자 진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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