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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를 구하는 것

다림영 2012. 4. 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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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를 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공부가 된다.
추사 김정희의 고택에 가면 '반나절은 책을 읽고, 반나절은 고요히 앉아 있는다
라고 쓰인 주렴이 있다. 고요함을 배우고 얻는 것이 옛사람들에게는 공부의 중요한
일부였다. 그러한 고요의 경계에 도달했을 때, 새로운 진리의 경계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요는 우리를 세속의 번뇌와 혼잡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혼의 결핍을 강하게 느낄 때 간절하게 고요한 공간으로 찾아가려 하는 것 같다.

또, 고요란 소리나 그 밖의 물질들이 없는 상태라기보다는 움직임이 없는 상태이다.오히려 고요 속에는 어떤 물질이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고요속은 마치 짙은 어둠 속처럼 어떤 막에 둘러싸인 느낌이다. 고요의 밀도는 보통 대기의 밀도보다 높다.
동양의 문화적 전총 속에는 '여백의 미학'이란 것이 있다.
비어있는 부분이 전체의 아름다움이나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뜻이겠으나 빈 부분이 사실은 빈 게 아니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즉 '여백의 미학'은 '비어 있음의 충만함'과 연결되어 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슈냐벨은 '나는 음표는 몰라도 쉼표는 다른 피아니스트들보다 더 잘 연주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슈나벨에게는 악보상의 쉼표도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연주하는 것이다. 오히려 앉아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님과 마찬가지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의외로 매우 힘들거나 매우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의 필수과목으로 '정좌靜坐'라는 과목을 넣고, 일주일에 몇 시간이라도 고요하게 앉아 있는 공부를 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요즘 문화가 점점 천박해지고 야단스러워지고 세상이 불안해지는 중요한 이유가 이 고요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미당 서정주의 시에 <고요>라는 시가 있다. 이 시에서 미당은 눈물과 시름으로만 고요를 찾고 만나는 사람은 고요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눈물과 시름이란 '고요의 그늘에 깔리는 한낱 혼곤한 꿈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꿈에서 깨어나 만나는 고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이 꿈에서 아조 깨어난 이가
비로소
만길 물 깊이의
벼락의
향기의
꽃새벽의
옹달샘 속 금동아줄을
타고 올라 오면서
임 마중 가는 만세 만세를
침묵으로 부르네.

 

이처럼 고요는 우리를 향기롭고 높은 세계로 데려간다. 세상의 변화는 점점 고요를 바보로 만들지만, 고요는 바보가 아니다.

<일요일의 마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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