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의 마지막 장이 낙엽의 신세가 되어 초라하게 달려있다. 설경이 그려져 있다. 오늘밤쯤 혹시 눈이 오려나, 날이 침침하다.
막연히 눈을 기다려본다. 세월 가는 소리라도 듣자는걸까?
올 1년은 산 것 같지를 않고 잃어버린 것 같다. 실물<失物>을 한 허망함과 억울함. 그러나 신고할 곳은 없다.
사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재치 박사라면 사는 것이란 싸움질이라고. 극히 재치없는 살벌한 대답을 할 것이다.
우선 일과의 사움. 어제의 노고를 무<無>로 돌리고 밤 사이에 돌아와 쌓여 있는 여자의 일, 일, 또 일.
빨랫거리, 연탄불 갈기, 먹을 것 장만하기, 청소 등 어젯밤에 분명히 다 끝낸 줄 알고 자리에 들었건만 아침이면 정확히 어제 아침만한 부피로 돌아와 쌓여 있는 일과의 영원한 일진일퇴<一進一退>의 빠움질, 시쉬포스의 신화는 바로 다름아닌 여자의 이 허망한 노고를 이름이렷다.
그러나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어찌 일뿐일까? 시장에 가면 장사꾼의 간교와의 싸움. 늘 이쪽이 비굴하고 저자세의 입장에 서야 하는 그래도 한 번도 이겨 본 일이라곤 없는 불리하고 불쾌한 싸움, 웃는 낯으로 아양을 떨며 달려드는 불량<不良>날림, 속임수, 허풍과의 싸움, 물가고와 주머니 사정과의 싸움, 툭하면 사회풍조를 타고 허구<虛構>위로 올라가지 못해 하는 생활을 땅으로 끌어내려야 하는 싸움, 마땅히 그래야 할 것과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것과의 싸움.
어디 그뿐일까.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르게 기르려는 것도 싸움질이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는 것을 저해하고 조소하는 온갖 악덕.... 이루 열거할 수도 없는 숱한 악덕과의 싸움질이다.
그럼 매일 이런 악전 고투에 임해야 하는 나는 무엇일까? 신념과 투지에 넘치는 호전적인 용사라도 된단 말인가.
천만에, 영문도 모르게 소집되어 최전방에 세워진 일개 초라한 졸병이다. 졸병은 왜 싸우는 것일까?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졸병이니까. 안 싸우면 자기가 죽으니까. 글쎄 어느쪽일까. 아무튼 훈장을 위해 싸우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달까.
바람이 유난히 센 날, 유난히 아득한 보금자리를 마련한 어미새가 있다면 아마 그 날갯죽지 밑에 고투<苦鬪>의 핏자국이 선연하리라. 그렇지만 나에겐 어미새만큼의 자신도 없다.
긴긴 겨울밤 올해도 얼마 안남았구나 싶으니 이런 일 저런 일을 돌이켜보게 되고 후회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시시한 후회 끝에 마지막 남은 후회는 왜 이 어려운 세상에 아이들을 낳아 주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후회가 된다. 그리고 황급히 내 마지막 후회를 뉘우친다. 후회를 후회한다고나 할까.
아아, 어서 봄이나 왔으면, 채 겨울이 깊기도 전에 봄에의 열망으로 불안의 밤을 보낸다.
책 박완서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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