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詩

중심/심수향

다림영 2010. 11. 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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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심수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새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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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잡지 못했다.

친구를 잃었다.

중심을 향해 곧게 앉은 단아한 배추처럼

그 모습으로 늙어가려고 매일마다 나를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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