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무너져 내리고 난 빈 자리에 작약이 피고 있다. 선연한 곷 빛깔과 그 자태가 사람의 발길을 자꾸 가까이 끌어당긴다. 5년 전 고랭지에 피어 있는 작약을 보고 가까이 두고 싶어 농원에 가서 백 그루를 사다 심었었다. 그런데 그해에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웬 검은 손이 와서 모조리 캐가고 말았다. 그때 남은 이삭이 움을 틔워 요즘 꽃을 피운 것이다. 기특하고 고맙다.
이른 아침 채소밭 머리에서 밤새 자라 오른 상추며 아욱, 오이넝쿨 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산천의 정기가 내 몸에까지 스며드는 것 같다. 아욱은 10여년 전 씨를 구해다 한번 부리고 나서는 해마다 거저 따서 먹는다. 지난해에 떨어진 씨앗에서 움이 터 내 일손을 덜어 준 것이다. 그 강인한 생명력이 놀라울 뿐이다.
요즘 나는 방 안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채소밭이나 뜰에 나가 어정거리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 방 안에서는 방석 위에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는 일이 고작인데, 뜰에 나가 있으면 생기에 넘치는 살아 있는 것들을 대할 수 있어 무료하지 않고 그 기운으로 나를 채울 수 있다.
올여름에는 거의 책을 보지 않는다. 눈이 번쩍 뜨이는 그런 책을 가까이 접할 수도 없지만 비슷비슷한 소리에 진력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돋보기글 맞추어 쓴 지가 10년도 훨씬 넘기 대문에 눈이 쉬이 피로해져서 책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종이에 활자로 박힌 남의 글보다는 나 자신을 읽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보다 소중하게 여겨진다.
해마다 이맘때면 저녁 어스름을 타고 쏙독새가 찾아와 오두막 위를 선회하면서 '쏙독쏙독 쏙독쏙독...' 내 벗이 되어 주었는데 2,3년 전부터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토끼도 해가 기울면 오두막 가까이 내려와 뜰에서 어정거리거나 채소밭에 들어가 요기를 하고 갔는데 요 몇 해 동안은 자취를 볼 수 없다.
겨울철에 산수국 대궁을 뜯어먹느라 그 아래 배설물을 남기고 간 자치를 보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밀렵군들 대무에 몹시 조심하는 것 같다.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뜻박에 묵은 일기장이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대충 훑어보면서 내 삶의 자취가 빛이 바랜 사진첩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995년 6월 17일 <토요일>,남불 생 레미에서 쓴 대목. 여행 중에 가지고 간 크리슈나무르티2의 <명상집>에서 인용한 글이 실려 있었다.
홀로 명상하라
모든 것을 놓아버려라
이미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말라.
굳이 기억하려 하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 되리라.
그리고 그것에 매달리면 다시는 홀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끝없는 고독, 저 사랑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토록 순결하고 그토록 새롭게 명상하라.
저항하지 말라.
그 어떤 것에도 장벽을 쌓아두지 말라.
온갖 사소한 충동, 강제와 욕구로부터
그리고 그 자질구레한 모든 갈등과 위선으로부터
진정으로 온전히 자유로워지거라.
그러면 팔을 활짝 벌리고
삶의 한복판을 뚜벅뚜벅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으리라.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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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집으로 돌아가는 시각이 되고 말았다.
손님도 없었는데 시간은 이렇게 빠르게 흘러버렸다.
저녁바람은 싸늘하고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는 거칠다.
건너편의 너른홀에도 텅 비어 있으니 보는 나 또한 쓸쓸하다.
그러나 자유로워지리라.
내게 따뜻한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축복인가.
아이들의 하루를 묻고 아이들의 내일을 의논하고 아이들의 아침을 계획하고...
조금 모자라는 여자가 무엇을 부탁하는데 그냥 해준다고 하니
아이처럼 기뻐하고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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