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첫 꾀꼬리 소리를 들었다. 오늘이 5월 19일, 우리 봉아가 나던 아침에 꾀꼬리 소리는 가장 어울리는 프로그램이다.
그해 1927년 6월 1일, 내가 각혈을 하고 절대 안정의 병석에 누웠을 제 잠 아니 오는 밤, 또는 최면약을 다량으로 먹고야 가까스로 한잠 들었던 밤이 지나고 창이 훤하여 올 때에는 으레 성균관 숲에서 꾀고리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꾀꼬리오, 고리, 고리, 고리오-"
"꾀꼬리오, 개개개 객-"
나는 누워서 이십여 종의 꾀고리 가사를 구별할 정도로 꾀꼬리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맑은 소리, 그 연연한 소리, 그 다정스럽고 욕심기 없는 소리<그러고도 결코 그는 경박하거나 천박한 시인은 아니다>...나는 죽어서 새로 태어난다면 꾀고리로 태어나리라고 몇십 번이나 수없이 생각하였다.
자연이 말하는 소리 중에 가장 아름다운 소리, 그것은 여름 아침에 듣는 꾀고리 소리라는 데 반대할 존재가 있을까.
"꾀꼬리는 부르주아 가객인가, 프롤레타리아 시인인가."
나는 이 문제를 제출해 보았으나 내 마르크시즘 지식으로는 분명한 해답이 안 나왔다. 그는 다만 가장 목청 고운 가객이요, 또 가장 첫여름의 자연을 이해하는 시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름다운 연애 시인.
있는자는 다 무상이다. 영원인 듯한 우주 자신도 날로 노쇠와 괴멸의 길을 밝거늘 하물며 일개 조그마한 꾀꼬릴까 보냐. 그의 노란털, 그 고운 소리를 내는 성대, 그의 사랑에 볼록거리는 가슴, 그것도 아마 십년을 넘지 못하여 스러져 버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상의 슬픔을 느낀다.
작년 내가 수술을 받고 누웠을 때 일기에 이런구절이 있다.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병을 앓으면 더욱 사람의 생명이 무상함을 깨닫는다. 더구나 어린 자식을 볼 때에 그러하다. 고공苦空,무상無常,무아無我.
그렇지만 무상이 반드시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다. 꾀꼬리 소리를, 방긋 웃는 한 송이 꽃을, 토실토실한 어린 아기의 몸을 젊은 사람의 몸과 정열을, 석양을, 지새는 달빛이 무상하다고 아니 아름다울 수는 없다. 아니, 도리어 그것들이 무상하기 때문에 , 지금 있다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아깝고 가련한 것이 아닐까. 그것들이 만일 영원한 것이라면 도리어 이상하지 아니할까.
모든 있는 것은 없어질 것이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슬프기도 하거니와 또 아름답기도 한 것이다. 이 꽃이 피기 전에, 이 꾀꼬리 소리가 끊기기 전에 이 청춘의 몸과 정열이 가시기 전에 보자. 듣자, 살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