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 글

지나간 여름날의 빛/해세

다림영 2013. 11. 1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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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하면서도 대단하다. 너무도 아름답게 최고로 작열하던 여름마저 때가되면 흘러가버린 다는 것은. 사람들이 추워 덜덜 떨면서 얼마간 어안이 벙벙해진 채 자기 방 안에 틀어박히게 되는 순간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다가오는가 하는 것도, 그렇게 앉아서 밖에 내리는 빗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희미하고 차갑고 광채없는 잿빛을 둘러싸이게 된다. 그것을 사람들은 다시 너무 잘 깨닫게 된다.

 

어제 저녁만 해도 우리들 주위를 다른 세계와 공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따스하고 불그스레한 빛이 부드러운 저녁의 구름 위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초원과 포도밭들 너머로 깊고 웅웅거리는 여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너는, 무겁고 깊이 잠들었던 밤이 지나면, 잿빛의 색 바랜 한낮을 쳐다보며 놀라고 만다. 창문 앞의 잎사귀들 위로 끊임없이 내리는 차가운 빗줄기 소리를 듣는다. 그러고는 이제 그 여름이 지나가버린 것을 알게 된다. 이제, 가을이 되었으며 곧 겨울이 올 것이다.

 

새로운 시간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방 안의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보며 그리고 때로는 음악을 들으며 보내는 삶 말이다. 그런 삶도 역시 아름답고 내면적인 것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런 식의 삶으로 옮겨 가기가 쉽지 않고 흥이 나지 않을 뿐이다. 추위에 떨고 슬픔을 지니고 내면에서 저항하는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 방은 갑자기 한꺼번에 변해 버렸다. 몇 달 동안 그 곳에서 나는 휴식을 취하거나 공기가 통하게 해놓고 작업했다. 방문과 창문들을 열어젖혀 놓고 안식을 취했다.

그곳으로 바람과 나무들의 향기와 달빛이 들어왔다. 나는 이 방에 들어오면 단지 손님일 뿐이었다. 잠시 쉬면서 책을 읽을 뿐, 진짜 생활은 방 안이 아닌 밖에서 이루어졌다. 밖으로 나가 숲에서, 호수에서, 푸른 언덕들 위에서 내 삶은 펼쳐졌다. 그림을 그리고, 걱정없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얇은 무명 재킷을 걸쳤다. 셔츠를 풀어 놓은 채 산책하거나 정처 없이 거닐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 돌연 이 방이 다시 내게 소중해졌다. 고향이 된 것이다. 아니면 피할 수 없는 감옥과 같은 장소가 되고 말았다. 일단 한번 계절이 바뀌고 난로에 계속 불을 지피다 보면 그것에 복종해 다시 방 안에 갇혀서 보내는 생활이 익숙해진다. 그것도 역시 아주 멋진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얼마 동안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 창가에서 저 창가로 어슬렁거리면서 구름에 싸여 감춰진 산들을 바라다본다. 어젯밤만 해도 그 위로 여전히 밝은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나뭇잎들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소리를 듣는다. 나는 추위에 떨면서 왔다갔다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입고 있는 따뜻하고 멋진 옷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아아, 셔츠 바람으로 거의 밤새 정원테라스 위에서 누워 보내던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숲속에 감미로운 바람결이 높이 나부기는 나무들 밑에 앉아서 보내던 시간은 어디로 흘러갔는가1

 

꽃들 속으로, 푸른 포도송이들 속으로, 빛바랜 숲속으로 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다락방으로 기어올라가 석탄 난로를 찾는다. 이 구역질나는 작은 우상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잘 다뤄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다시 불을 피워 온기를 줄 것이다.

 

작은 꽃병은 비어있다. , 한때 그안에 담겨 있던 꽃들은 얼마나 푸르렀고, 얼마나 화창한 여름날의 빛을 띠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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