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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면 정조처럼/김준혁/더봄

다림영 2023. 1. 1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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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경연 시간에 절대 어려운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는 만약 정조가 어려운 질문을 하면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신하들이 있을텐데 그러면 그들이 무안해할 것 같아 의도적으로 어렵지 않은 질문을 해서 모두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면서 정조는 신하들에게 무리하게 일을 하게 하지도 않았다. 정조는 이 문장을 자신의 침실벽에다 써 놓고 늘 가슴에 새겼다.

 

"일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말은 다 하려고 하지 말라."

어려운 처지에서 일을 시작해서 온갖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분노를 참고 사람들을 배려하며 그들의 실수나 무능력을 비난하지 않고 부드럽게 깨우치는 리더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이끌어갈 리더이다.p152

 

정조는 즉위 후부터 외척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려고 했다. 정조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춘저때부터 척리의 무리를 너그러이 용서해 준적이 없었다. 김과 홍 두 집안은 처지가 어떠한가. 그런데도 실로 범하는 바가 있으면 한 번도 법을 굽힌 적이 없었다. 이는 우러러 자전과 자궁의 사사로움이 없는 훌륭한 덕을 믿었던 것인데, 또한 척리를 온전히 보전해 주는 방도이기도 했다."p154

정조의 외가인 풍산 홍씨의 세손 정조를 음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혜경궁 홍씨의 작은 아버지이자 정조의 작은 외조부인 홍인한은 정조의 세손 시절 자신의 집안사람인 하익룡을 병조의 서리로 만들어서 동궁에서 일하게 했다. 하익룡은 동궁을 지키는 명을 받았다는 핑계로 정조의 일거수일투족을 홍인한에게 보고 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조는 늘 언행을 조심했고, 은밀한 이야기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p155

 

9가지 좌우명으로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히다 

'좌우명'이란 무엇인가?'좌우'란 바로 자신이 앉은 자리의 옆이란 뜻이다. 명이란 자신이 반드시 새겨야 할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니 '좌우명'이란 자신의 옆자리에 평생의 마음을 가다듬고 하고자 하는 뜻을 바로 새겨놓은 격언을 말하는 것이다. 

정조는 다른 궁왕들에 비해 특별히 글씨를 잘썼는데 그것은 글씨를 통해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 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의 곧고 굳건한 글씨에 심취하여 '마음이 곧 글씨'라는 좌우명을 갖게 되었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생존을 위해 자신을 단속하면서 마음과 행동을 온전하기 위하여 글씨를 반듯하고 정성스럽게 쓰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형이상학적 좌우명이고 그의 실제 좌우명은 자신과 백성을 위한 대동사회론에 기반을 하고 있다. 

첫째 좌우명은 입지立志이다. 뜻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목표를 정하여 나아가는 것이고 氣를 통솔하는 것으로, 모든 근간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이치를 밝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에 대한 이치를 밝히는 것이 바로 군주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셋째는 거경居敬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경敬으로 자신의 행동을 연마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했고 자사子思는 말하기를 "공경을 돈독히 하면 천하가 태평하여진다."했다. 그래서 정조는 학문과 역사, 즉 세상에 대한 공경을 높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넷째는 하늘을 본받는 것이다. 하늘은 바로 도道인,중정中正하고 순수한 것이 .하늘의 도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역경]의 "하늘의 운행은 꾸준한 것이므로 군자가 이를 본받아 쉬지 않고 스스로 노력한다"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하늘을 본받는 것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다섯째는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조는 간언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다스리고 천하의 선한 말을 나오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즉 [상서]에 나오는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간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여섯째는 학교學敎를 일으키는 것이다. 학교를 다시 일으켜 백성을 똑똑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백성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일곱째는 인재를 기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국왕이 총명하고 국정운영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혼자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다. 그래서 정조는 인재 육성의 중요성과 훈련된 그들을 기용하여 나라를 위해 쓰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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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국왕은 곧 백성들의 부모이니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아홉째는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이다. 정조는 [역경]의 "절재에 의거 법도를 만들어서 재화를 낭비하지 않으면 백성을 해치지도 않는다"는 말과 "사치로 인한 폐해가 천재보다도 더 심하다."는 말의 의미를 늘 가슴깊이 생각하고 검소함을 추구했다. 그가 무명옷을 입은 군주, 반찬을 5가지 이상을 먹지 않은 군주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검소함을 숭상해야 한다는 좌우명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p161

 

정조는 대규모 진법 훈련의 중요성만이 아니라 무사들의 개별 말 다루는 기술의 연마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본인이 탁월한 궁마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인재는 비록 적어도 궁마의 기술이 이와 같이 숙달되었어니 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 진실로 믿을 수 있겠다. 다만 말을 모는 데는 기술이 있어서 천천히 하면 느슨한 데 가깝고 , 빠르게 하면 넘어지기 쉽다. 오직 소리를 조화롭게 하고 절조를 맑게 하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하는 데 달려 있으니, 그런 뒤에야 나라가 크게 패하는 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시험한 바는 미미한 한 가지 기예에 불과하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바는 늘 썩은 밧줄로 여섯마리의 말을모는 것과 같다는 경계에 있었다. 경들은 알고 있으라."p185

 

"군자는 싸움을 하지 않을지언정 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했으니,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

폐단을 척결하고 반드시 개혁을 하겠다는 정조의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이다. 원래 군자는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싸움을 해야 할 상황이 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당시 정조의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고 정조는 선대왕 때부터 기드기권을 형성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던 잘못된 법령과 제도를 과감히 바꾸는데 전력을 다했다. p203

 

 "온양행궁의 세 그루 홰나무는 경진년(1760,영조36)행행 시에 명하여 심은 것으로, 수십 년 사이에 뿌리는 깊어지고 가지는 무성해져 엄연히 들보의 재목을 이루었다, 왕가의 홰나무 그늘은 오히려 후세에 덕을 심은것이라고 일컬어지거는 하물며 옛날에 북돋워 심어놓은 은택이 남아 있음에랴. 대저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니, 예를 들면 직산稷山의 연蓮과 순안順安의 밤에서 성인의 교화가 사물에 입혀지지 않음이 없음을 알 수 가 있다. "

 

정조는 사도세자와 인연이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보답을 하고 그를 기렸다. 그러한 행동이 백성들에게 사도세자에 대한 이미지를 호즤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효심의 자연스러운 발로이기도 했다. 

1791년(정조 15)7월 중순 도성에는 흐트러진 머리에 더러운 얼굴로 문밖으로는 일절 나가지 않고 노파에게 의지해 사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정조에게 전해졌다. 그 노파는 과거 궁궐에서 일하던 궁인이었고 함께 사는 여인은 사도세자를 모셨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정조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궁금했다.그래서 이여인들의 삶을 알아보게 했다. 노파는 실제로 영조 재위 시에 궁중에서 일하던 궁녀였다. 함께사는 괴이한 여인은 노파의 조카인 이씨로 역시 궁인이었다.이씨는 1760년 사도세자의 승은을 입게 된다. 하지만 사도세자와 얽힌 여러 루머 때문에 노파와 궁 밖으로 나와 소천어동[현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살게 됐다. 

 

그런데 1762년 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이씨는 자신도 죽기로 작정하고 폐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런삶이 30년가까이 지속했다. 사도세자와의 짧은 인연을 지키기위해 평생을 수절하고 세상과 담을 쌓은 것이다. 

정조는 이 이야기에 감동받고 신하들과 협의해 궁녀였던 이씨에게'수칙'이란 작위와 정렬 이란 칭호를 내리고, 경제적지원과 함께그녀의 집에 '수칙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는 편액을 달게했다.아버지에 대한 효를 이렇게 보여준것이다. p216

 

 

정조 효사상 실천의 백미는 사도세자를 위한 지극한 효성과 어미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진찬례이다.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는 많은 반대와 우여곡절을 거쳐 완성단계에 있는 화성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계기이자, 화성 성역이 상징하는 여러 가지 정치적 의미를 확인하고 집권 후반기의 개혁정국을 알리는 시위였다. 

 

"재계하는 날 각신에게 하교하기를 ,"요사이 자궁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시경]에서 100편을 발췌하여 [모시백선]이라고 이름짓고 경들로 하여금 분담하여 언해로 번역해서 올리게 했다. 옛날에 김만중은 하룻밤 사이에 [구운몽]을 지어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쳤는데, 더구나 나의 경우에는 뜻을 봉양할 수 있는 길이 오직 여기에 있으니, 경들은 게을리 말고 힘쓰도록 하라."

정조는 백성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함으로써 향촌사회의 상하 질서를 유지 할 수 있고 그 안정화를 통해 국가 기강을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p219

 

 

정조는 국왕이 된 후 12월 3일이 되면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행동한 홍국영. 서명선.김종수.정민시.이진형과 동덕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함께 즐겼다. 그리고 이들에게 영원히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것이 바로 보종시保終始였다. 어떠한 일을 하여도 절대 사약을 내려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실제 홍국영이 즉위 4년 뒤 오만방자하고 왕비시해를 기도하는 역모를 꾀했지만 정조는 그를 강릉으로 유배를 보냈을 뿐 사형언도를 내리지 않았다. 

..

정조는 동덕회의 회원들이 죽는 날 까지 그들에게 우의를 보냈다. 서명선은 소론의 영수이고, 김종수는 노론의 영수였다. 비록 채제공이 동덕회멤버는 아니었지만 정조는 동덕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탕평정국을 이끌었다. 

 

하늘 문에 구름 해치는 저녁이요

함지에 해 떠받드는 가을이로다

백년을 이 모임 길이 한다면

덕을 함께하고 복도 함께 하리라

 

여기에 더해 정조는 이런 모임을 만들고 즐기는 것은 위태로웠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다. 다시말하자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나라의 리더들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초심을 잃는 것이다. p228

 

[정조실록]1786년 9월 14일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의빈의 죽음 이후에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라고 했다. 국사란 아들을 낳을 일을 말하는 것인데,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을 정조는 이렇게 표혔했다. 4정조는 의빈을위하여 다음과 같은 명銘을 남겼다.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하면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몸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입은 극진한 말을 했으나 복록이 은덕에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운명인가 보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데 멀고 오랜 세월동안 배회하몀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 "p236

 

정조는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의 성스러움은 내가 감히 바랄 수 없지만,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의 마음은 내가 감히 놓쳐버릴 수 없다"라고 하면서 중국의 성인들과 같은 군주나 성인이되고자 했다. 요임금, 순임금,우임금,탕임금과 같은 성인군주가 되고 주공이나 공자같이 경전의 최고라 평가받는 주역을 완성한 성인이 되고 싶어했다. 정조가 이와 같은 발언을 하고 역사에 기록된 성인 군주들의 행동과 같이 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감히 넘볼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정조의 요순 이미지화는 성공했던 것이다. 

 

정조는 요임금을 따라서 자신의 이미지만 만든것이 아니라 도시 건설까지 이어졌다. 그 도시가 바로 수원화성이다. 

"이 부를 화성이라 이름한 것은 대개 화華땅의 봉인이 축복을 올린 뜻을 붙인것이다. 원소의 주산이 곧 화산인데 , 花와 華는 통하고 남쪽에 유천이 있으니 , 화산유천花山柳川은 그 또한 만화방창萬化方暢한 뜻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요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부유해지고, 모두 건강하게 오래 살고, 인구가 번성하여 큰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다는 것이다. ..

 

정조는 조선의 역대 국왕 3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들이 한 행동을 1다라하거나 그모습을 계승하고자 했다. 바로 세종, 효종, 영조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만든것은 세종이 한 집현전과 같은 것이다. 세종이 [농사직설]등을 통해 농사를 장려했듯이 정조는 해마다 농사윤음을 발표하고 농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세종이 중국과 대등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칠정산이란 달력을 만들었듯이 정조도 서현력이란 달력을 만들었다.

 

정조시대를 문예부흥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세종시대의 문화를 다시 부흥시켰다는 것이다. 정조의 노력은 바로 세종을 잇기 위함이었다. 우대한 세종을 통해 정조는 자신을 세종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오륜행실도]를 간행한 것이 세종의 [삼강행실도]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이야기했다. 

 

정조는 신하들과 수시로 활을 쏘았다. 정조는 활쏘기를 할 때 역대 국왕의복장을 하고 나왔다.선대왕들의 유품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히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대구帶鉤는 효종이 사용하던 것을 쓰고,자립紫笠은 현종이 쓰던 것을 그대로 썼다. 금대錦帶는 숙종이 쓰던것을 썼고, 협수夾袖는 영조가 사용하던 것을 꼈다. 정조가 차고 있던 패도佩刀역시 사도세자가 사용하던 것이다.

 

정조가 이런 유품을 신하들과의 활쏘기에 착용하고 나온 것은 선대 국왕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것보다 실제로는 역대 국왕의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있다는 선언을 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특히 효종을 많이 내세웠다. 영조가 효종을 내세운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영조는 늘 효종의 혈맥이 나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반정을 통해 국왕이 된 인조는 무능력한 국왕이었다.병자호란을 당해 백성들의 고통속에 빠뜨린 국왕이었다. 그러니 인조를 계승한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효종은 백성들의 한을 풀기 위해 북벌을 추진한 국왕이었기에 조선의 모든 사대부들과 백성은 효종에 대한 애틋함과 존경심이 있었다. p249

 

정조의 비밀어찰이 단지 노론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에게만 전달된 것은 아니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소장된 정조의 비밀어찰은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과 소론을 지향하는 무당파이자 당대 무반의 영수 조심태에게 보낸것도 있다 . 채제공은 정조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사도세자가 죽은 날 영조가 세손이었던  정조를 불러 "너의 가장 사심없는 신하다"라고 할 정도의 인물이었으며 그후 정조는 한 번도 그에 대한 신임을 끊은 적이 없었다. 

 

조심태 역시 정조가 만든 핵심군영인 장용영의 대장을 역임한 인물로 단순한 무장이라기보다는 도시계획 전문가이자 국방개혁의 핵심인물이었다. p254

 

"요사이 날씨가 따뜻하고 화창하여 내원의 꽃소식이 특히 이르니, 경들과 더불어 꽃구경을 해야겠다. 내가 내각을 설치한 이래로 이 직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한집안 사람처럼 보고 있으니 오늘의 모임도 집안 사람을 대하는 예禮를 쓰겠다."

 

정조의 이말은 규장각각신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정의 관료전체에게 군신은 한가족이라는'군신일가'君臣一家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조가 군신간의 동락이 결국 국가운영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p268

 

 

"선대왕 경술년(1769)행행 때에 대를 들르셨고 오늘 내가 또 여기 에 왔는데 산천이 옛날과 다름없어 사물엦 ㅓㅂ하면 감회를 일으키니, 내 마음이 더욱 절실하여 슬프고 사모하게 된다. 병자년(1636)에 적병이 밤을 타서 널빤지를 지고 성에 오르는 것을 아군이 발각하고 끓인물을 부으니 모두 문드러져 물러갔다 하는데 , 이곳이 바로 그곳인가?"

..

정조는 남한산성 내에서 병자호란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모든 시설물을 돌아보면서 신료들에게 북벌에 대한 의지를 다시 강조했다. p277

 

 

정조는 경연 經筵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성이 굶주리면 곧 나도 배고프고 백성이 배불리 먹으면 나도 배부르다. 더욱이 흉년의 재해를 구제하여 돌보는 것은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서둘러야 할 일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는 바이니, 잠시라도 중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 한 가지 정사를 행하고 내일 한가지 일을 행하여 곤경에 처한 나의 백성들을 편안ㅁ한 자리로 옮겨 오도록 한 뒤에에 나의 마음이 바야흐로 편안할 것이다. 학문과 사업은 원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니다.

 

진실하게 쌓아가고 힘써 오래하여 물 뿌리고 땅을 쓰는 일에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일에 이른 뒤에에 공부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니, 사업이나 학문을 막론하고 중도에 그만두어 그전에 이룬 공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p284

 

"[예기],<악기>에 '선왕이 주례酒禮를 만들 때에 일헌一獻의 예법을 빈賓과 주主가 백배를 하도록 하여 종일토록 마셔도 취하지 않게했다'고 했으니 술이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예에서도 깊이 경계한 바인데, 이 장에서는 '술은 정량이 없었다.'라고 하고, 주자가 풀이하기를 '양을 정해 놓지 않고, 취하는 것으로 절도를 삼는다.'고 하여 마치 취하지 않으면 그치지 않는 것처럼 했으니 어째서인가?"

 

..이같은 정조의 질문에 이익운은 '정량이 없었다.'는 두 글자는 외면만 얼른 보면 마치 사람을 취하도록 유도한다는 혐의가 있을 듯하지만, '어지러운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세글자를 보면 정량이 없는 가운데 절로 정량을 둔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주량이 같지 않으니 다만 얼근히 마시는 것일뿐입니다. '취하는 것으로 절도를 삼는다의 취取자가 어찌 얼근히 마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p301

 

"무릇 사람들이 말하는 주량이 있다는 자'가 술에 의해 부림을 당하여서 절주를 하고자 하면서도 절주를 하지 못하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 중에서도 심한 경우가 아닌가. 절주를 해야 할 때는 절주를 해서 비록 반 잔의 술이라도 입에 가까이 대지 않고, 마시고 싶을 때는 마시되 비록 열말의 술이라 할지라도 마치 고래가 바닷물을 들이키듯 마신다면, 이러한 경우를 두고 비로소 주량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술에는 한량이없다고 하셨으니, 여기에 비로소 '한량이 없는 술'은 곧 '한량이 있게 마신다'고 이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p303

 

정조는 스스로 안변의 석왕사에 비문을 씀으로써 불교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안변 석왕사는 태조 이성계의 꿈을 무학대사가 풀어준 곳이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꾼 꿈이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창업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주었고 , 이때부터 이성계는 창업군주로서의 꿈과 의지를 실천했었다. 그러니 석왕사는 단순한 사찰이라고 할 수 없는 조선왕실과 매우 밀접한 곳이었다. 

 

정조는 석왕사 비문을 이렇게 썼다.

"불교는 삼교중에 가장 늦게 나왔지만 그 영험한음 가장 두드러진다. 유자는 이를 믿지 않지만 또한 왕왕 믿지 않을 수도 없으니,이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대체로 사람에게는 서원이 있으니 부처에게는 자비가 있어 지성으로 빌면 무량한 축력을 받을 수 있다. (중략) 목숨을 구하는 자는 목숨을 얻고, 자식을 구하는 자는 자식을 얻고, 삼매를 구하는 자는 삼매를 얻고, 마니를 바라는 자는 마니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치가 원래 그런것이다. "

 

이처럼 정조는 불교가 갖는 신비로움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부처의 은덕이 조선의 건국도 도와주고 자신이 아들을 얻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더해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찰인 용주사를 만들고 용주사의 대웅보전에 안치될 석가모니 불상에 대한 기복祈福게도 직접 작성했다. P345

 

"서양의 사학이 여러 도에 두루두루 편재해 있으나 유독 영남과 해서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영남은 퇴계의 유풍이 남아있고, 해서는 율곡의 지나친 감화가 남아있다. 내가 사학에 미혹된 무리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혹 너무 느슨하게 다스린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다.

 

저 미혹된 자는 술취한 사람과 같으니 술이 깨면 다시 정상인이 된다. 만약 그가 취했다해서 재빨리 법률을 사용해서 후회의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이것은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이니 내 어찌 이를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정조는 서학이 비록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어도 정학이 바로 서면 모두 해결될 것이라 강조하고 그들을 함부로 처벌하는 것은 오히려 백성들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P348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리더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리더가 조직을 잘 이끌고 경제활동을 통해 돈을 많이 벌어 직원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한차원 더 높을 일을 하려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상과 문화를 만들고, 그러한 문화와 사상을 통해 우리나라를 널리 섹메에 알려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약성을 극복하고 진정 섹메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문화인임을 우리스스로 자각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시대 리더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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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리더들은 분명 공부를 할 것이라 본다. 그들이 정조의 책 한권만이라도 제대로 읽고 공부하고 세상에 나아간다면 욕을 먹을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니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사람인지라 끊임없이 초심의 마음으로 공부를 하지 않기에 일말의 알수 없는 일들이 무지기수로 일어나는 것일게다.

회사의 리더, 동네의 리더, 가게의 리더, 집안의 리더, 형제의 리더... .. 우리 모두는 각자가 있는 공간에서 어떠한 리더이다. 끊임없이 나를 닦으며 선인들의 지혜와 끈기를 바탕으로 모든 관계와 일을 마주한다면 화를 만나게 되는 일은 없을터인데 쉽지않은 인간세계이다. 

언제죽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살아있는동안 행동과 정신 모든 것에서 부지런한 공부에 임해야 하겠다. 빛나는 오늘을 위해 더욱 환한 내일을 위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기위해... 

정조의 이야기는 드라마에서 숱하게 보아왔지만 존경스럽고 무한히 아름다운 사람이다. 만분의 일 천분의 일이라도 그 를 닮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겠다. 그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드라마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치 않기에 그만두지만 언젠가 마음이 어수선할때 아마도 찾아보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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