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가을이 아니다. 겨울도 아니다. 11월은 늦가을과 초겨울이 만나는 그 언저리 어디즘이다. 입동과 소설이 들어 있지만 그것은 달력 속의 절후에 지나지 않는다.
비가 오다가 눈이 되기도 하고, 눈이 다시 비로 변하는 달, 진눈깨비의 달, 노란 산국화도 보랏빛 쑥부쟁이며 구절초도 11월에는 모두 빛을 잃는다.
도요새와 기러기와 그리고 갈까마귀 같은 철새들이 날아오고 또 날아가는 계절, 초록이 바래 버린 덤불에서 작은 열매들이 마지막 햇볕을 즐기고 있을 때, 새들은 높이 날아 멀리 길을 떠난다.
떠나는 것이 어디 철새들만이겠는가. 11월이 되면 마음이 먼저 길을 떠난다. 무엇을 잃은 것 같아 차표를 사고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밤차에 몸을 싣는다. 어느 간이역 자판기에서 뽑은 한 잔의 커피가 주는 따스한 온기, 플랫폼에 서 있는 이국 여인의 쓸쓸한 뒷모습, 철로 위에 부는 바람, 역사 옆으로 길게 늘어선 쥐똥나무 울타리의 야트막한 침묵.
11월에는 모든 것이 침묵한다. 벌레 소리가 침묵하고 나뭇잎들이 침묵하고 사람들이 침묵한다. 비밀스럽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목을 움츠리고 어딘가를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감시자의 눈을 피하듯 굳게 닫힌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내려진다. 동화속에 나오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처럼 멀지 않아 성큼 겨울이 다가서리라.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여름내 분별없이 늘어놓았던 헛된 약속들은 모두 낙엽과 함께 떨어 버리고, 그리고 조금씩 가벼워져야 한다. 11월이 오면 질경이며 수쿠렁이며 강아지풀이며 명아주 같은 것들 조차 버릴 줄을 안다. 씨앗을 털고 여름동안 턱없이 비대해진 줄기 같은 것도 풍장하듯 바람에 맡긴다.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하얀 억새의 저 가벼운 몸짓처럼, 구름이 가벼워지고 그 위를 날아가는 철새들의 깃털이 가벼워지고 그리고 우리도 가벼워진다.
11월이 오면 털실로 짠 목도리를 하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강으로 가고 싶다. 제일 먼저 날아온 도요새와 목줄기가 파란 청둥오리와 노랑부리갈매기와 관우가 멋진 댕기물떼새들을 만나고 싶다.
갈대밭 위로 부는 바람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득히 멀어져 가는 먼산을 보며 또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아오는 길에 불빛이 아늑한 어느 목로에 앉아 한잔의 술로 식어가는 가슴을 데우고 싶다.
추수가 끝난 빈 들판, 로버트 오웰의 우수어린 눈빛 같은 하늘, 조금은 수척해 보이지만 슬퍼 보이지는 않는 이 가난한 11월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한 해가 다 하기까지는 아직 한 달이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얼마남지 않은 저금통장의 잔고를 아끼듯이 나는 나의 이 마지막 여유를 아기고 싶다.
12월은 언제나 후회 속에 보내야 했다. 돌아다보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시간은 벌서 저만치서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정월과 2월은 너무 추웠다. 3월은 언제나 스산한 바람. 4월과 5월은 1년 가운데 제일 아름다운 달이요 기대와 희망의 달이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불안한 달이었다. 4.19와 5.18이 들어 있는달,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달, 4월과 5월은 꽃을피게도 하고 또 지게도 했다.
11월은 내가 좋아하는 바바리 코트를 입을 수 있는 달이고, 첫눈을 밟을 수 있는 달이며, 술과 담배와 그리고 커피가 제 맛을 내는 달이다.
무엇보다 11월은 혼자 여행하기에 좋은 달이다. 새벽 4시 반에 가방 하나를 들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와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빈 들판, 깊은 사념에 잠긴 산맥을 배겨로 줄을 지어 서 있는 앙상한 낙엽송의 숲들, 갈색 털실뭉치 같은 몇 개의 가치둥지와 아득히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있는 검은새가 있는 풍경. 이 까칠한 풍경 속에서 나는 공복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결핍속에서 느끼는 충만감, 승리가 아니라 패배 뒤에 오는 안도감 같은 것.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느끼는 부드러운 우수와 쓸슬한 해방감, 11월에는 언제나 그런 체념의 그림자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감의 기이한 빛이 서려있다.
11월은 이미 흘러가 버린 일에 대하여 후회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갔음을 알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기에는 남은 날들이 얼마 되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그냥 잠들기에는 아직은 이른 시간, 가볍게 떠나는 모든 것들에게 목례를 보내고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힌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린다. 공복처럼 편안한 11월의 마지막 밤을.
한국의 명수필2 중에서
'오늘의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가슴을 잃지 않는다면/법정 (0) | 2013.10.19 |
---|---|
정미소풍경/구활 (0) | 2013.10.18 |
사랑/로렌스D.H.Lawrence,영국 (0) | 2013.10.17 |
바보 처세술(김금자) (0) | 2013.10.15 |
삶과 죽음의 예지/장자/윤영춘 (0) | 2013.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