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 글

십년이란 세월/손광성

다림영 2013. 10. 12. 19:40
728x90
반응형

 

 

십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단순히 일 년을 열 배한 시간일까?

아니면, 백 년의 십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시간일까?

인생 칠십에서 본다면 십 년이란 그리 짧은 시간만은 아닌 것 같다. 강보에 싸옇던 아이가 뛰어나와 제 머리통보다 더 큰공을 차올리고, 학교 울타리에 심은 손가락 만한 포플러 묘목이 어른 허리통만큼이나 크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이십대에 헤어진 여인이라면 벌서 눈 가장자리에 거미줄 같은 잔주름이 잡혔거나, 아니면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나타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다.

 

새로 입사한 사원이 과장이나 부장의 서열까지 승진할 수 있는 시간이 십 년인가 한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십 년 근속표창을 받을 것이고, 도도하던 고참 선배들의 퇴임 송별연에서는 어였한 사회자로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시간, 그것이 십 년인가 한다.

 

부부라면 어떨까? 신혼의 단꿈은 이미 사그라들고 서로가 서로를 소 닭 보듯이 하는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슬퍼하지말자. 그 때까지 이혼하지 않았다면 앞으로 오십 년은 보장된 셈이니까. 그리고 마주 보기만 해도 수분이 되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같은 사랑이 되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산술적으로 본다면 십 년보다는 이십 년이, 이십 년보다는 오십 년이 더 긴 시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감이란 반드시 그런 수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백보다 아흔아홉이 더 많게 느껴지는 이치로 생각한다면 십 년이, 삼십 년이나 오십 년보다 훨씬 의미 심장한 실감으로 느껴지질 때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업을 시작한 후 최초로 맞이하는 십 년처럼 벅찬 감격의 순간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조그만 개인 사업이든 새 공화국의 건국 사업이든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십 주년 기념일은 가장 감격적인 축사로 시작해서 거창한 기념 행사로 끝나게 마련이다. 그 다음에 오는 이십 주년이나 오십 주년 기념일 같은 것은 어차피 한물가기는 마찬가지이다.

 

십 주년에 버금갈 수 있는 것은 백 주년 기념일이라고나 할까. 셰익스피어 탄생 백 주년 기념 강연회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백 주년 기념일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렇게 감격적인 것이 못 된다. 셰익스피어라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그런 기념일 같은 것이 그에게 무슨 기쁨이 되겠는가.

 

건국 기념일도 마찬가지다. 건국의 주역들은 이미 가고 없다. 백 주년 기념 행사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그런 행사란 단순히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실감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 세대의 단위를 삼십 년으로 잡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새 같이 급변하는 시대에서는 십 년이 과거의 삼십 년과 맞먹는다. 옛날에는 삼십 년 전쟁도 있고 백년 전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단 며칠 아니면 몇 달이면 끝난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이 대립에서 화해로 바뀌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오 년 안팎의 일이었다. 그 엄청난 걸프전도 단 몇 달 동안에 끝나고 말았다.

 

앞으로 올 십 년이 기대된다. 남북이 통일되고, 나는 오십 년만에 나의 고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꿈속에서조차 떨며 휴전선을 넘던 그런 불행한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언젠가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왔다. 반갑고 기쁜 마음에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십 년동안 소식이 없던 동창이 찾아왔다면 뻔한 일이 아닌가. 간첩이 아니면 월부 책장수지.”

수줍음을 잘 타던 홍안의 내 친구는 십 년이란 세월 동안에 이처럼 걸걸한 생활인이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매달 일만 원씩 꼬막 열 달 동안 부어야 하는 월부 책 한 질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십 년이란 세월을 생각하게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