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강은교/문학세계사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강은교/문학세계사
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굳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손택수 <가슴에 묻은 김치국물>
김치국물의 깨우기
밥을 먹다 김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뻘건 고춧가루 투성이지만, 저것이 싱싱한 배추였을 때를 상상한다. 배추 하나가 배추밭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모습도 상상한다.
그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저것이 그 밭을 떠나 트럭에 실려 공판장으로 온몸이 던져지며 올 동안, 그렇게 탐스럽던 저것의 이파리가 찢어지며 누구의 장바구니엔가 옮겨져, 또는 슈퍼마켓의 환한 불빛 아래 있다가 옮겨져 짠 소금에 절인 허리를 담근 다음, 그 지독한 고춧가루에 버무려지고 생각, 파 냄새도 간혹 맡으면서 남은 숨 모두 넘어가 버릴 때, 나는 과연 어디 있었는가, 나는 무엇을 했는가. 다만 김치조각을 쫙쫙 찢으면서 식탁에 앉아 오늘의 일정표를 들여다보았는가. 우스개 개그TV프로그램이나 보면서 배꼽 빠지게 웃었는가.
저것이 몸을 바쳐 나의 피를 적싱며 나의 위장으로 흘러들어갈 동안 나는 김치조각에 감사하지도 않았다. 내가 찢는 저 김치조각이 실은 하나의 우주였으며 하나의 존재였음도, 나를 겸손하게 하는 구나,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먹다 남은 것은 빨리빨리 쓰레기 분리수거 바구니에 버렸을 뿐이다.
전화- 이 시는 언제 어디서 착상했는지, 그 동기, 배경등은 무엇인지요?
답변- “이 시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쏟은’이 아님)의 착상은 친구와 몹시 다툰 날의 일을 아무 꾸밈 없이 있었던 그대로 풀어낸 것입니다. 가끔씩 이렇게 전혀 시적이지 않을 것 같은 일상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화하면서 바뀐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은 그때 제가 입고 있던 옷은 ‘흰 와이셔츠’가 아니라 검정색 티셔츠였습니다. 검정색 티셔츠에 묻은 김치 국물을 보다가 이걸 흰 와이셔츠로 바꾸는 순간 시가 흘러나왔습니다. 시를 쓴 후 저는 바로 친구에게 화해의 전화를 걸었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의 중심어는 맨 마지막행 ‘가슴에 슬쩍 묻혔나 볼 일이다’의 조사 ‘나’입니다. ‘묻혀도’ 혹은 ‘묻혀’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묻혀나’라고 한 것은 그만큼 타자와의 소통이 힘들다는 것을 은근히 힘주어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시는 어떤 작은 깨달음을 얘기하고 잇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엔 그런 깨달음의 탈을 쓰고 괴로워하고 자조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 시에 깔린 슬픔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인의 말이다.
이렇게 시는 가끔 우리의 정신을 퍼뜩 놀라 깨게 한다. 일어서게 한다. 누구나 언제나 먹는 김치를 가지고 이런 시를 만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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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미사여구로 옷을 입은 시보다 이런 시가 좋다.
지극히 소소한 일에서 반짝이는 울림을 얻으며 시로 승화하는 시인들이 부럽다.
시를 잘 쓰지는 못하나 시를 왜 읽어야 하는 가를 깨닫는다.
오늘도 몇 편씩 꼭 찾아 읽게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