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헤르만 헤세/두행숙 옮김/ 이레

다림영 2013. 5. 23.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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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우울한 구름

  

산과 호수, 강 그리고 태양은 내 친구들이었으며, 내게 이야기를 건네고 나를 성장시켰다. 오랫동안 나는 그것들을 어떤 사람들이나 그들의 운명보다도 더 다정하고 더 친숙하게 느꼈었다. 그러나 내가 반짝거리는 호수와 서글퍼 보이는 전나무들, 햇살이 내리쬐는 바위들보다 더 좋아했던 것은 구름이다.

  

이 드넓은 세상에서 구름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세상에서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사물이 있으면 내게 가르쳐다오! 구름은 유희이면서 눈에 보이는 위안이다. 그것들은 신이 부여한 축복이자 재능이며, 분노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위력을 지녔다. 구름은 마치 갓 태어난 생명처럼 감미롭고 부드러우며 평화롭다. 그것들은 아름답고 풍요롭고 마치 착한 천사들처럼 베푼다.

  

그것들은 죽음의 사자처럼 어둡고 벗어날 수 없으며 또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구름은 얇은 층을 이루면서 은가루처럼 떠다니는가 하면, 가장자리에 황금빛을 띤 채 하얗게 반사하며 항해해간다. 구름은 노란색, 붉은색, 청색으로 변하면서 휴식하는 듯이 멈춰 있다. 구름은 마치 살인자처럼 음울하게 천천히 스쳐 지나간다. 그것들은 폭주하는 말 탄 기사들처럼 거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질주해 간다. 혹은 우울한 기분에 잠긴 은둔자처럼 높은 창공에 창백하고 서글프게 꿈꾸듯이 매달려 있다.

  

구름들은 축복받은 섬들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또한 축복하는 천사들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그것들은 위협적인 손들 같기도 하고, 돛단배의 펄럭거리는 돛과도 같으며, 하늘에 떠서 배회하는 두루미들 같기도 하다. 또한 그것들은 모든 인간들의 동경을 아름답게 비유한 존재로서, 신이 계시는 하늘과 가난한 지상 사이를 떠다닌다. 그리고 하늘과 지상 양쪽에 다 속하며, 지상의 꿈이 되기도 한다. 그 꿈속에서 그들은 오염된 영혼을 순수한 하늘에 매달리게 한다.

 

 

구름들은 영원히 방랑하는 것들, 모든 추구, 갈망, 향수의 영원한 상징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땅과 하늘 사이에서 수줍으면서도 동경하듯, 그리고 저항하듯 매달려 있다. 그처럼 인간들의 영혼도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수줍어하고 동경하면서, 그리고 저항하면서 매달려 있다.

  

오오, 구름이여, 아름다우면서도 쉴새없이 떠다니는 존재여!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그것들을 사랑햇다. 구름을 바라보면서 나 역시 구름이 되어 삶 속을 떠다니게 되리라는 것은 알지 못햇었다. 여기 저기 낯선 곳을 방랑하면서,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떠다니면서 살아가게 되리라른 것을.

   

어린시절부터 구름은 내게 다정한 여자 친구이자 누이들이었다. 어느 골목길을 지나가다가도 우리들은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했고 때로는 잠시 눈인사를 나누었다. 또 그 당시 그들한테서 배운 것 역시 나는 잊지 않았다. 그들의 형태와 색채와 모습, 그들이 펼쳐 보이는 유희, 함께 빙빙 돌며 추는 윤무, 그들의 휴식, 그리고 그들이 흘러가면서 지상과 천국에 관해서 들려주는 이상야릇한 이야기들을....

  

곧 내가 구름들에게 다가가갈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구름들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많은 구름 무리들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엇다. 내가 최초로 산봉우리 위로 올라간 것은 열 살 때엿다. 우리가 사는 니미콘 마을의 기슭 알프스 초원 지대에 있는 산꼭대기였다. 그때 나는 정말 처음으로 산들의 모습이 무서우면서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깊이파여 들어간 협곡들은 얼음과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녹색으로 반짝거리는 빙하들,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빙하들이 쌓인 산등성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높고 둥근하늘.

  

태어나면서부터 10년 동안 산과 호수에만 갇혀 살아왔고 , 가까운 언덕들에 둘러싸여 비좁은 공간에서만 살아온 내 머리 위에, 최초로 거대하고 드넓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앞으로는 도저히 경계도 끝도 없는 듯한 지평선이 바라보이던 바로 그날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이미 그 산꼭대기로 올라갈 때부터, 나는 아래쪽에서 보았을 때는 친숙했던 가파르게 경사진 바위벽들이 그처럼 위압적이고 거대한 것을 알고 새삼 놀랐었다. 그리고 산봉우리에 올라선 순간 완전히 제압당했다. 두려움과 환호의 느낌 속에 돌연 거대하고 드넓은 공간이 내게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세상은 마치 동화속에서처럼 그토록 거대했다!

거기서 바라볼 때 우리가 사는 마을 전체는 저 아래 깊숙이 놓여 있어 어디론가 사라질 듯 조그맣고 밝은 반점으로만 보일 듯 말 듯했다. 골짜기 아래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좁고 가깝게 여겨졋던 산봉우리들은 실제로는 몇시간을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 대해 아주 협소한 눈길을 한번 주었던 것일 뿐, 사실은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바깥 세상에는 산들이 서 있고 거대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데도, 그에 대한 아주 적은 소식마저도 우리가 사는 이 외딴 산 구석에는 도달하지 않는 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챘다.

  

그러나 동시에 내 안에서 무엇인가 마치 나침반의 바늘과 같은 것이 있어, 저 멀고도 거대한 세상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갈구하며 강렬하게 떠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나는 그 구름들이 지닌 아름다움과 우울함을 완전히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내가 본 것은 무한히 먼 것을 동경하면서 방랑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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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문학회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수필을 배우며 헤세의 글을 읽어보라 하셨던 선생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제야 절실하게 느낀다 . 읽고 또 읽어보아도 그림 같은 글이다.

아는 만큼 보이듯이 아는 만큼 쓴다는 선생님 말씀이 가슴 저리도록 밀려오는 날들이다.

읽고 읽고 읽는 날들... 돌아서면 잊고 말지만 그래도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 속에서 헤세의 보라색 수필집이 더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다음 주에도 헤세의 책을 빌려야 하겠다. 사람도 채워지고 글도 조금씩 다듬어지기를 기원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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